보통 세계 지도나 지구본에서 동아시아 지역을 볼 때 항상 궁금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독립 국가로서의 몽골과 중국의 일부분으로서의 내 몽골이 서로 별도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본다면 주변에 있는 이 국가들만 봐도 대충 몽골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예상이 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예상은 맞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몽골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의 대립과 분리 과정에 대해서 빠르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3세기 중반 아시아 전역과 동유럽 일부까지 정벌하며 지옥의 사자로 여겨졌던 몽골은 이후 이렇게 네 개의 국가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이곳 중국 전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원나라는 약 100년 뒤인 1368년 새롭게 등장한 한족의 국가 명나라에게 수도를 빼앗겨 멸망했는데 그 잔존 세력들이 북쪽으로 밀려나 국가를 이룬 것이
바로 북건이었습니다. 이후 북건은 17세기 무렵까지 내전과 통일을 반복하며 존속해오다가 이곳 현 내몽골 지역이 1635년 가장 먼저 청나라의 지배권으로 들어갔고 이후 외몽골 즉 현 몽골 지역은 청이 지속적으로 대항하다가 1691년 결국 내몽골과 마찬가지로 청해에 복속됩니다 한편 청나라가 내몽골과 외몽골을 모두 장악하던 무렵 이곳 서쪽 현 신장 북부 지역에서는 또 다른 몽골 잔존 세력이 준가르 한국을 수립해 계속해서 명목을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 한 세기 뒤인 1755년 위구르족의 반란과 더불어 청나라군의 침공으로 결국 멸망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후 청나라 당국은 끈질기게 자국에 대항했던 중가르족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했고 이때 중가르족 인구의 약 80%가 학살과 질병으로 인해 제거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중가르가 거의 증발되다시피 하면서 이제 몽골은 사실상 고비사막을 기준으로 남쪽 내몽골과 북쪽 외몽골 두 지역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이 두 개의 몽골은 지리적 차이로 인해 청의 서로 상반된 통치 방식에 놓이기 시작합니다.
수도인 베이징과 훨씬 가까웠던 내몽골은 중앙정부에 더욱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고 또 상대적으로 교육한 토지를 가진 내몽골은 타 지역의 한족들이 가뭄과 기근을 피해 이주하면서 청에 더욱 빠르게 응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와 멀리 떨어진 외몽골은 내몽골에 비해 더욱 많은 자치를 누릴 수 있었고 척박한 그들의 영역 안에서 계속해서 몽골인으로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갑니다.
아 그러던 1850년 청나라를 내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그 사건이 발생합니다.
약 14년 동안 이어진 태평천국과의 내전 끝에 청나라는 대부분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내전에서의 승리는 말 그대로 상처뿐인 승리에 불과했습니다.
양측 군대에서 벌어진 총력전 그리고 역병 기근으로 인해 사망자는 최대 3천만 명에 달했으며 반란 지역에서의 세금 단절과 전쟁 진압에 퍼부은 비용은 청의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재정 악화는 그대로 청나라 국민들의 부담으로 떠넘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세금을 관습적으로 가축 상납으로 헤그르던 외몽골은 더 이상 가축이 아닌 은을 세금으로 상납해야만 했는데 이 시기 한쪽 상인들은 은이 부족한 외몽골 사람들에게 막대한 금리로 은을 빌려주기 시작합니다.
결국 은상납 이후 대출금을 제대로 갚지 못한 몽골인들은 상인들에게 가축을 무더기로 넘겨줄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거래는 외몽골 가축의 급격한 저하로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외몽골의 경제는 20세기 초까지 계속해서 내리막을 걸었으며 생계에 막대한 타격을 입은 외몽골 내부에서는 당국에 대한 반발과 독립 의식이 날이 갈수록 깊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20세기 초반 무렵 청나라 당국이 몽골에 대한 자치권을 박탈시키려는 행보까지 보이면서 외몽골 주민들의 분노는 더욱더 쌓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당시 불교 국가였던 음몽골은 불교 지도자 8대 제춘단반 후툭투를 중심으로 몽골 독립 세력을 꾸려나가며 청나라에 반기를 들 준비를 이어나갑니다.
그러던 1911년 10월 수원을 중심으로 한 한족 혁명 세력이 청나라 타도와 공화정 수립을 외치는 신의 혁명을 일으킵니다.
이전부터 독립 선언 시기를 노려오던 외몽골 지도부는 이러한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결국 1911년 12월 29일 외몽골은 대륙이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독립 국가인 독득한국을 건설합니다.
이후 복두 정부는 주한민국 정부가 혼란을 추스려 무력 제압을 감행하기 전에 빨리 외세의 도움을 받아 내몽골까지 통합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들은 국제적인 독립 인정을 받아내기 위해서 여러 외세 특히 가장 인접한 러시아 제국과 지속적인 접촉을 이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제국은 남쪽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모두 장악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몽골의 독립 선언은 러시아의 목표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몽골이 독립에 성공한다면 중앙아시아의 여러 소수민족에게 크나 큰 자극을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한편으로 러시아는 왜 몽골에 독립된 세력이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완충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러시아는 몽골의 독립과 중국 편입 사이에서 지속적인 고민을 이어나갔고
결국 그 절충안으로서 외몽고를 독립 국가는 아니지만 중국이 영향을 받지 않는 높은 자체의 형태로 유지시켜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내몽골의 중국 내 자치는 다른 소수민족들의 독립 욕구를 크게 자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완충지로서 몽골을 유지시킬 수 있는 말 그대로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방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러시아는 외몽골과 중화민국 정부 양측에 이 같은 제안을 던집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양측 세력은 러시아의 개변과 같은 제안에 동의할 리가 없었습니다.
몽골 입장에서는 기껏 독립했더니 다시 중국 밑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내 몽골 통합까지 포기하라고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고 중국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멋대로 내전 간섭을 한다고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죠.
한편 이렇게 복두 정보와 중국 그리고 러시아 간 의견 충돌이 계속해서 오가던 상황 속에서 또 다른 세력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동안 청나라에 직접적으로 통치되어 왔던 내몽골 자치구였습니다.
당시 내몽골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리 청나라에 직접적인 통치를 받아왔었다.
하더라도 외몽골과 민족적 동질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이로 인해 복특한국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이 다수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주한민국 당국은 이러한 내몽골의 여론에 위기를 느끼며 대대적인 회유와 우대 정책 그리고 협박을 동원하였고 이렇게 내몽골 내 반독립 세력 관망을 이어오던 세력들의 여론을 서서히 중국 쪽으로 기울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독특한국 지도부는 이 같은 분열 시도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결국 몽골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화민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이어져 가던 1912년 11월 경 러시아와 독특한 곡은 몽골 존속에 관한 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이 조약에서 독특한 곡은 자신들 세력을 외몽골이라는 용어 대신 몽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합의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약 수립 이후 지도부는 러시아가 내몽골과의 통합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해 준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렇게 1913년 2월 중화민국과의 내몽골 해방 전쟁을 개시합니다.
전쟁 초반 몽골군은 무기와 보급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러 전투에서 계속해서 선전하며 승리를 이어나갔고 내몽골 내부에서도 이미 전쟁이 벌어진 이상 중화민국보다는 복득 한국과의 민족 통합에 더욱 여론이 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몽골의 기세에 맞서 대한민국 정부 또한 치열하게 반격을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외몽골까지 독립을 선언한 상황 속에서 내몽골마저 내어주게 된다면 국력의 심각한 저하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몽골 군의 기세에 버금갈 정도로 치열하게 전쟁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수결 간의 전쟁 과정에서 복득 한국은 초반부터 문제였던 보급과 무기의 부족 문제로 중국군에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1913년 10월 네몽골 내 다수 점령지를 차례차례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왕이 빠르게 기울어가는 사태 속에서 당시 모든 진행 과정을 지켜보던 러시아는 승리가 확실시된 중한민국 측과 접촉하여 1913년 11월 5일 러중 북경 선언을 발표합니다.
본 선언에서 러시아는 몽골의 지휘를 중국의 자치국으로서 공식적으로 격하시키기로 합의했고
1912년 몽로 협정 당시 인정했던 몽골의 명칭을 외몽골로 다시 되돌리며 내몽골과의 통합을 완전히 불가능하도록 확정 지었습니다.
또한 당시 양국 간 전쟁터로 전락하며 넉망하던 내몽골은 전후 민족 통합 운동이 사실상 종결되었고 이후 외몽골과 내몽골은 서로 엮일 일 없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독특한 국과 중화민국 그리고 러시아는 외몽굴 독립과 자치 문제로 또다시 3자 회담을 이어나갔고 결국 1915년 6월 독특한 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 내에서 사실상 독립된 수준의 자치 국가로 남아 있는 것으로 협정을 맺습니다.
이후 러시아는 중국과의 완충지대로서 몽골의 자치를 보장해 주었고 이렇게 몽골은 독립 국가는 아니지만 러시아의 지원 하에 높은 자치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전황이 너무 빠르게 변하기에 핵심만 이야기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혁명 직후 러시아는 공산주의 세력 적군과 자유주의 왕당파 연합 백군의 치열한 내전에 휩싸였고 당시 외몽골 자치의 이를 갈고 있던 중화민국은 이러한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중화민국은 1919년 곧장 군대를 이끌고 독특한 국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후 순식간에 외몽골을 장악한 중화민국 당국은 이들의 자치권을 모조리 박탈시키며 대대적인 탄압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1920년 10월 무렵부터 이번엔 웅게른 슈테른베르크를 필두로 한 러시아 백군 세력이 외몽골로 들이닥쳐 중국군을 격파하고 유패당했던 복특한까지 다시 복권시키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조력자의 도움을 받은 복특한은 1921년 3월 13일 다시금 몽골 독립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5개월 뒤 이렇게 독립했던 몽골에서 또 다시 다른 세력의 침공이 이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몽골 공산주의 혁명 세력인 몽골 인민당과 볼셰비키 적군의 연합이었습니다.
공개된 슈테른베르크를 비롯한 백군 세력은 공산세력의 침공으로 인해 몽골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렇게 몽골은 몽골 인민당의 주도 하에 새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몽골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복특한은 바지사장 역할로서 국가 수반으로 유지되었고 이후 1924년 독특함마저 사망하면서 몽골 인민당은 1924년 11월 26일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인 몽골 인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이렇게 외몽골 지역이 소련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된 동안 내몽골은 지속적으로 주한민국 정부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930년대부터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괴르 국가인 만주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렇게 외몽골과 내몽골은 계속해서 별도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분열이 완전히 공식화된 계기는 1945년 8월 14일 소련과 중화민국이 맺은 중소 우호 동맹조약이었습니다.
본 조약 이후 중화민국은 외몽골 내 독립 투표를 통해 몽골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시료 지배 중인 내몽골은 그대로 중화민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립하여 내몽골도 그대로 중국 공산당의 치아에 들어가게 되었고 몽골인민공화국은 수십 년간 소련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소련이 붕괴를 맞이하던 1990년 마침내 온전한 독립을 맞이합니다.
그 이후로도 오랜 기간이 지난 현재 보여드린 표와 같이 몽골과 내몽골 자치구는 이미 상당한 문화적 경제적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대국 사이에 끼어 분열된 오늘날 몽골의 모습이 한국의 입장에서는 크게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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