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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자유의 상징이던 나폴레옹 등장, 유럽의 위대한 정복자가 되다.

by 디지털노마드방랑객 2023.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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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부패한 왕과 귀족에 대항한 민중들의 자유주의 혁명이 발생합니다. 

프랑스 국왕인 루이 16세가 민중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귀족들은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주변 국가들로 대대적인 엑소더스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내 국가들은 왕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에 막대한 충격을 받았으며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군주와 귀족이 통치하는 국가들은 혁명의 불길이 자신들에게까지 번져 목이 뎅강 날아갈까 불안감에 떨고 있었습니다.

결국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에서 촉발된 혁명의 불씨를 꺼뜨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줄줄이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군주제를 수호하는 유럽 국가들과 프랑스 혁명 정부 간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의 정국 속에서 나폴레옹이 인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프랑스를 장악합니다. 당시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었던 나폴레옹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그가 이끄는 군대는 어김없이 연합군을 아작내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변 국가들은 줄줄이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전쟁을 중단했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의 중심이었던 오스트리아마저 나폴레옹의 군대에 박살나 전쟁을 멈추게 되자 바다 건너에 있던 영국도 결국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전쟁을 잠정 중단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국가들과 동시에 전쟁을 치렀던 프랑스는 1802년 마침내 유럽 국가들로부터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혁명으로 어수선해졌더라도 프랑스는 왕정 시절부터 전통적 강대국으로서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프랑스를 무너뜨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당시 영국은 서서히 팽창을 가속해가는 러시아 제국의 동향도 계속해서 살피고 있어야 했기에 프랑스와의 전쟁에 국력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최소 5대 1 이상의 맞장까지 이겨낸 나폴레옹은 민중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프랑스 전체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렇게 나폴레옹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국제 체제에서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영국을 배제하고 자신들 중심의 새 판 짜기를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자신이 중심이 되는 체제를 설계하고자 했었는데 이는 결국 유럽의 패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동안 유럽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쳐왔던 영국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자신을 배제하려는 행위에 극심하게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두 강대국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냉혹한 국제 정치의 제로섬 게임 속에 휘말려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1803년 영국은 1년간의 짧았던 평화를 파괴하고 또다시 프랑스의 선전 포고를 하기에 이릅니다. 나폴레옹 전쟁이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그 시점에 대해선 논란이 있으나 1803년 시작된 이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의 시작점으로 대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전통적 왕권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사실 영국뿐만 아니라 여타 주변 국가들의 체제 유지에도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연쇄적 혁명을 틀어막고 전통적 질서를 수혜하는 다른 주변 국가들도 시기의 차이일 뿐 결국 프랑스와의 충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었죠.

그렇게 잠시 동안의 짧은 평화를 맞이했던 유럽은 1803년 영국을 시작으로 다시 한 번 국가들의 운명을 건 전쟁에 돌입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프랑스 혁명 전쟁 이후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렇게 19세기 세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는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다 건너의 영국은 사실 유럽 대륙에서 나폴레옹과 직접적으로 싸우기는 제한되었기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막대한 금전과 물자를 퍼부어주며 프랑스를 상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전선을 휘몰아치며 연합군을 끊임없이 분쇄해 나갔고 결국 1806년 7월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압도적 무력 앞에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러시아는 너무 거리가 멀었고 영국은 바다 건너에 있었기에 제대로 싸우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패배하자 자연스럽게 제3차 프랑스 동맹은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전쟁 과정에서 신성 로마제국 산하에 있던 독일 지역 일부 국가들은 프랑스의 속국으로 전락 나폴레옹은 이들 국가를 엮어서 프랑스 치아의 라인 연방을 새롭게 창설합니다. 그렇게 독일 지역 국가들이 대거 분열되고 그 중심에 있던 오스트리아까지 프랑스에 박살나자 결국 독일 지역 국가연합인 신성 로마 제국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붕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독일 지역의 주요 국가 중 하나인 프로이스는 이러한 연합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독일 국가들을 대거 자신의 속국으로 전락시키고 자신들의 국가 연합체인 신성 로마 제국까지 붕괴시킨 것에 격노하며 프랑스에 대한 보복을 결심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프로이스 내 프랑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던 와중에 1806년 8월 비르템베르크에서 요한 필립 파이라는 서점 주인이 나폴레옹을 비난하는 서적을 게시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자신에 대한 모욕적인 책이 출가된데 극대노하며 이따위 글을 적은 작가가 누구냐며 찾아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시 그 책은 익명으로 작성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나폴레옹은 자신을 모욕한 작가를 찾아내는 데 실패합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분노는 익명의 작가 대신 이 책을 게시한 서점 주인에게 향하기 시작했고 결국 서점 주인이었던 요한 필립 팜은 나폴레옹을 모욕한 책을 게시한 죄로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독일의 자존심을 구기던 프랑스에 대해 프로이센은 참고 참고 또 참았으나 이 같은 사건은 결국 프로이센 왕실의 막대한 분노를 야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1806년 10월 9일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에 뛰어듭니다. 이렇게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제4차 연합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프랑스 군은 압도적인 노력으로 프로이센 군을 격파해 나가기 시작했고 프로이스는 전쟁 개시 겨우 보름 만에 프랑스 군에게 베를린을 내주는 충격적인 패배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프로이센을 초토화한 프랑스는 곧장 폴란드 지역에서 러시아와의 전투를 시작했고 러시아도 결국 프랑스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807년 7월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알렉센들 1세는 평화 조약을 맺어 전쟁을 중단하였으며 이 조약에서 프로 유세는 영토의 절반이 뜯겨나가는 처참한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연합국이 연속적으로 처참한 패배를 맞이한 이후 유럽은 아주 잠시 동안의 짧은 평화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승리한 프랑스와 달리 패배한 주변 국가들은 결국 복수전을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 2년 뒤인 1809년 오스트리아는 과거 전쟁으로 빼앗긴 독일 지역 국가들과 자신의 영토 그리고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는 과거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 제국 전역의 남정네란 남정네는 죄다 영끌하여 병력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5차 연합전쟁이자 오스트리아의 리벤지 매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1809년 4월 대규모의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를 향해 출병하였고 6개월 간의 피비린내가 자욱한 전쟁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또다시 나폴레옹에 패배하고 말았고 이 전쟁의 결과로 영토의 20%를 프랑스에 빼앗기는 치명적인 보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스트리아의 복수는 아무런 소득도 없는 처참한 패배로 끝난 듯 보였으나 사실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나폴리 형에게 있어 치명적인 상처 하나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전쟁부터 이번 나폴레옹 전쟁까지 그동안 단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하지 못했던 나폴옹은 이곳 비엔나 지역에서 작정하고 준비한 오스트라군에 의해 본인 주의 역사상 최초로 대대적인 패배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각 숙가들에게 나폴레옹이 결코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으며 나폴레옹 자신에게도 막대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전쟁으로 프랑스가 다른 국가들을 아작내는 동안 영국은 계속해서 회전을 통해 프랑스 군을 아작내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 영국은 프랑스가 바다로 빠져나오지도 못하도록 막강한 해군력을 동원하여 해상 봉쇄를 감행하고 있었는데 결국 1806년 나폴레옹은 이에 분노하며 영국이 유럽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을 막아내고 영국의 핵심 돈줄이었던 유럽과의 무역을 차단하기 위해서 대륙 봉쇄령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대륙 봉쇄령은 프랑스에 굴복한 유럽 국가들에게 참여가 강제되었으며 1807년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었던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시행 이후 초반 몇 년 동안은 러시아도 프랑스에 잘 협조하여 대륙 봉쇄에 참여하였는데 당시 러시아는 영국에 대한 곡물 수출길이 막히자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1810년 러시아는 영국의 공모를 수출하면서 대륙 봉쇄령을 어기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러시아는 원래 폴란드 지역도 자국의 영역으로 장악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과거 프로이슨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폴란드까지 마음대로 해방시켜 자신의 속국으로 삼아버리자 러시아는 프랑스에 대한 불만을 계속해서 쌓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폴란드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하며 프랑스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고 이렇게 대륙 봉쇄령부터 폴란드 문제까지 다양한 이유가 쌓이고 쌓이며 결국 너펠레옹은 자꾸 기어오르는 러시아에 대해 제대로 손을 봐줘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1812년 나폴레옹은 계속해서 갈등을 빚던 러시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합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과 동맹군을 합쳐 무려 60만에 달하는 대군을 출병시켰고 이들은 지난 제5차 대프랑스 동맹까지 격파시킨 이후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1812년 6월 24일 자신만만한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초입의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하루 50킬로미터 이상을 행군해야 했던 보병들의 사기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습니다. 

발은 부르트고 일사병에 픽픽 쓰러지는 병사들까지 속출하는 상황 속에서 중간에 마주치는 러시아의 군대는 프랑스의 진격을 계속해서 지체시키고 있었습니다. 여차저차 이곳 빌뉴스에 도달한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가 프랑스 대군의 유용 앞에 항복하겠다는 연락을 해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챠르의 연락은 깜깜 무소식이었고 나폴레옹은 점점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군에게 여름은 상당히 고통스러웠지만 러시아에서 더욱 무서운 것은 여름의 무더위가 아니라 겨울의 한파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추위가 몰아치기 전에 빨리 침공을 마무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마음이 급해진 나폴레옹은 차례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 빠르게 빠게 러시아의 안쪽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수십 킬로미터의 행군 찌는 듯한 더위 대규모 탈영을 겪어내며 나폴령의 병력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가고 있었고 중간에 러시아 군과 치러낸 보로디노 전투에서는 무려 7만 명에 달하는 병사가 죽거나 다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1812년 9월 14일 지옥 같은 행군 끝에 나폴레옹은 마침내 모스크바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러시아의 정신적 수도였던 모스크바까지 점령한 나폴레옹은 이제 차르인 알렉산드의 일세가 싹싹 빌며 연락해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당시 27만 명이 모여 살고 있어야 할 도시 모스크바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상태였습니다. 

잔류한 주민 몇몇을 제외하고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폴룡은 차르가 자신을 엿먹였다는 사실에 비탄과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 프랑스 군이 도착한 9월 14일 모스크바에서는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 화재로 인해 프랑스 군은 보급을 위한 약탈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화재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모스크바에 잔류한 한 주민이 프랑스의 군대가 약탈하며 버틸 수 없도록 고의적으로 불을 질렀다는 설이 유력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화재로 인해 모스크바 내 건물 7알이 잿더미로 변했으며 나폴레옹은 차례의 연락을 받기 위해 폐허가 된 도시에서 10월 18일까지 한 달 이상의 시간을 낭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는 도시에서 식량은 바닥나고 군대의 사기는 뚝뚝 떨어지고 타향병은 매일매일 속출하고 있었는데 가장 무서운 사실은 이미 러시아의 겨울이 찾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1812년 10월 19일 나폴레옹은 결국 항복을 받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60만 대군을 이끌고 출발했던 나폴레옹에게 당시 남아 있던 병력은 50만이 증발한 고작 10만 명 뿐이었습니다. 해병대는 괴멸했고 마차는 당연히 끌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병력이 걸어서 프랑스로 돌아갈 만 했으며 병사들은 줄줄이 태량 러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나폴레옹이 떠나 있던 사이 프랑스에서는 쿠데타 시도까지 벌어지고 있었는데 1812년은 나폴레옹이 느끼기에 그야말로 최악의 해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은 만신창이가 된 병력을 이끌고 간신히 돌아오게 되었지만 러시아에서 아작난 나폴레옹을 지켜보던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등 주변 국가들은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며 리벤지 매치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러시아 원정 직후인 1813년 제6차 연합전쟁이 발발합니다. 

나폴레옹은 연합군과 맞서기 위해서 온갖 공력을 긁어 모으기 시작했으나 이미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던 나폴롱의 군대는 180만에 달하는 각 유럽의 연합군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결국 1814년 4월 23일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연합군의 무력 앞에 처참히 패할 수밖에 없었고 나폴레옹은 즉각 엘바섬으로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연합국은 프랑스에 다시 부르봉 왕가를 복권시켰고 프랑스 혁명 이후 약 20년 만에 나폴리의 시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다들 아시다시피 나폴레옹이 1815년 에바섬 탈출을 전격 감행하며 연합국가의 대대적인 복수전을 치렀으나 그 유명한 워털루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하며 길고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전쟁 이후 나폴레옹은 아예 탈출은 꿈도 못 꾸도록 남대서양 저 멀리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으며 1821년 5월 5일 섬에 갇힌 채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통치기로 이어진 20년간의 격동의 시기는 역사 뒷편으로 사라졌으며 유럽은 프랑스 혁명으로 오염된 체제를 무너뜨리고 과거의 전통적 질서를 되찾고자 열심히 발버둥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회의가 빈 회의이며 그렇게 유럽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린 체제가 바로 빈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유주의 혁명 이후 유럽 세계는 더 이상 그 이전과 같은 절대주의 시기로 온전히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찍어 누르고자 했던 혁명의 불씨와 오염된 체제는 평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고 있었고 19세기 유럽은 곧 자유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각축장으로 변화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패도를 추구하고자 했던 프랑스가 무너지고 또다시 강대국 간의 눈치 게임이 시작된 유럽 세계에서 주요 강대국이었던 두 국가 영국과 러시아는 그들만의 또 다른 경쟁 그레이트 게임을 이어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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