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개혁(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 생기는 일들
요즘 인플레이션이 참 심하죠. 생활 물가가 장난이 아닙니다. 0 세는 일도 어려울 정도로 말이죠. 인플레이션을 잡기위해 화폐개혁을 하자는 논의는 2010년대 이후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단위가 확 줄어버리면 겉보기에 아무래도 물가 상승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심리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생활 물가 상승률이 줄어들 것이다라는 이론이죠.
그런데 왜 정부는 아직도 화폐개혁을 못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안하는 걸까요?
화폐개혁을 하게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우리나라의 과거 역사, 그리고 북한의 사례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박정희 정부 당시 화폐개혁
박정희 정부는 나라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둑이 많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화폐 개혁을 단행했는데, 교환 가능한 금액을 제한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달 월급 정도의 돈만 교환할 수 있도록 하고, 나머지 금액은 추후에 처리하겠다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화폐 개혁의 목적은 누가 돈을 가지고 있는지 밝히는 데 있었습니다. 이 화폐 개혁으로 환이 원으로 바뀌며 10환이 1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처음에 원을 사용하다 환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원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겪었고, 현재 사용 중인 원의 시작은 1962년의 제3차 화폐 개혁입니다.
이전에도 두 번의 화폐 개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 중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의 한국은행 조폐창이 점령당하면서 발생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자 북한군은 이를 이용해 위조 화폐를 유통시켰고, 부산으로 수도를 옮긴 한국 정부는 화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대부분의 화폐 개혁은 전쟁 중 혼란과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졌으나, 1962년의 화폐 개혁은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발전과 민족 정치의 바로잡기를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권유했지만, 독립 후 10~15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일본 식민지 통치로 인해 분단됐다는 인식이 강했던 한국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나라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둑이 많다'는 생각으로 화폐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화폐 교환 액수를 제한하며 시행된 이 개혁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개혁의 목표는 숨겨진 돈을 시장으로 끌어내 금융권으로 유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준비 부족과 함께 급작스러운 개혁 발표로 인해 혼란이 극심했습니다. 둘째, 조사를 통해 실제로는 국민들이 보유한 돈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정부의 세력은 부자들이 현금을 움켜쥐고 있어 시장에 돈이 돌지 않고, 경제와 산업 발전에 자금이 부족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화폐 개혁 후 조사해 보니 국민들은 실질적으로 돈이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기업과 재벌들도 예상만큼 자산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케네디 정부는 강하게 항의하며 화폐 개혁이 사회 혼란을 초래하고 국민의 불신만 키웠다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인출 금액 제한과 같은 규제는 몇 달 만에 해제되며, 정부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두 가지 주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첫째, 국민들의 혼란이 컸고, 둘째, 물가가 상승했습니다. 화폐 가치가 안정적이지 않고 갑자기 변경될 때 사람들은 더 안전한 달러나 금, 토지 같은 자산을 선호하게 됩니다. 이러한 불안감으로 인해 외화와 실물 자산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해당 자산의 가치가 오르고, 반대로 화폐 가치는 떨어져 물가가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정부는 경제 내 자금을 통제하고 인플레이션을 바로잡으려는 목표로 시작한 화폐 개혁이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자 모든 제한을 해제하고 정책을 철회했습니다.
북한의 화폐개혁과 결과
그럼 이번에는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 북한에서 있었던 화폐 개혁에 대해 알아보려 하는데요. 2023년 10월 3일 아침, 북한 당국은 각 지방 당국에 “10월 5일 오전 10시에 중대한 회의가 있으니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이상 간부들, 각 기관장 및 재정 책임자들은 모두 참석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에 북한 주민들은 혼란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많은 주민들은 그날 밤 늦게까지 장마당에 몰려들어 물건을 사들이며 또다시 화폐 개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습니다.
그렇다면 화폐 개혁이란 무엇일까요? 화폐 개혁은 경제적 또는 정책적 목적을 위해 화폐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구 화폐의 유통을 중단하고 새로운 화폐로 교환하거나, 고액권을 발행하거나, 화폐의 액면 가치를 절하하는 등의 방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화폐 개혁은 큰 위험 부담과 부작용을 동반합니다. 구 화폐의 교환은 생각보다 많은 비용을 수반하며, 고액권 발행은 세금 탈루와 불법 거래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화폐 단위 조정은 물가 상승을 초래하고, 사회적 혼란과 민심의 악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에서 화폐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성공 사례는 드물며 그 위험성은 큽니다. 그러나 북한은 10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다섯 차례나 화폐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는 예상대로 참담했습니다. 경제적 무능력으로 인해 초인플레이션과 생활고가 발생했고, 현금 다발을 들고 자살하는 사람들까지 나왔습니다. 화폐와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며 빈부 격차는 극심해졌습니다.
북한의 첫 번째 화폐 개혁은 194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945년 8월,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경제적 문제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금융 체계를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었고, 패망 직전 과잉 화폐를 발행하여 화폐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치솟았습니다. 게다가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며 북한은 금융 기관이 부족했고, 대부분의 은행과 신용기관의 본점은 남한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일제가 발행한 조선은행권이나 소련의 루블화를 사용했으며, 북조선 중앙은행은 화폐 발행권도 없었습니다.
결국 소련은 주둔군 유지비로 화폐를 계속 발행했고, 이는 북한 내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화폐 개혁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북한의 첫 번째 화폐 개혁은 소련도 그 심각성을 인지하여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소련 각료회의는 ‘화폐 교환’이라는 명목으로 북한의 화폐 개혁을 결정했고, 이에 따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1947년 12월 1일 새로운 화폐 발행과 신고, 화폐 교환에 대한 결정을 채택했습니다. 김일성은 “지금까지 우리는 자체 화폐가 없었지만, 이제 우리의 화폐를 갖게 된다. 이는 인민 경제를 강화하고, 남조선의 반동분자들이 위조화폐로 북조선 시장을 교란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화폐 개혁의 목적은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지주와 반공주의자들의 재산 몰수, 과잉 화폐로 인한 물가 상승 억제, 일원화된 금융 체제 구축을 통한 북한 금융 체제 안정, 그리고 위조화폐 근절로 안정된 통화 유통 보장이었습니다.
이 개혁은 12월 5일에 공표되어 12월 6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북한은 이 기간 동안 구화폐를 신화폐로 교환해 주었지만, 교환 한도를 계층과 소유 형태에 따라 차등 설정해 다수 주민의 화폐를 몰수했습니다. 예를 들어, 천만 원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교환 한도가 100만 원이라면 나머지 900만 원은 가치가 없어지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로 북한은 상공업자와 종교 집단의 화폐 자산을 모두 몰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947년 화폐 개혁은 북한 기준으로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중앙은행의 발권 기능을 강화하며 금융 체제 구축에 성공했고, 지주와 반공주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해 인플레이션 억제 효과도 있었습니다. 또한, 차등 교환 한도를 통해 몰수한 자산을 재분배해 사회적 불균형을 줄였습니다.
북한은 12년 후인 1959년 두 번째 화폐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이번 개혁에서는 구화폐인 북조선중앙은행권 100원을 신화폐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권 1원으로 교환하는 100대 1 비율의 화폐 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북한은 농업과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완료하고 전후 복구를 마치며 경제 성장의 절정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성장률이 30%를 넘나들며 경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기에 주민 소득 분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무난한 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1979년에는 세 번째 화폐 개혁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때의 배경에는 1973년의 세계적인 오일 쇼크가 있었습니다. 유가 급등으로 불안을 느낀 북한 주민들은 돈을 움켜쥐고 내놓지 않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은 화폐 교환을 통해 주민들의 돈을 회수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김일성 우상화 및 김정일의 후계 체제를 공고히 하는 작업이 병행되었습니다.
1992년, 북한은 4차 화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당시에는 국가에서 배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기에 큰 혼란은 없었지만, 점차 주민들은 돈 자산에 대한 불안감과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4차 화폐 개혁은 소련의 붕괴 직후 시행되었습니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북한은 경제적 후원자를 잃었고, 이에 따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화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북한은 화폐 교환 시 가구당 2만 원까지만 은행에 예치할 수 있도록 했고, 출금을 제한하는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화폐 개혁이 아닌 몰수에 가까웠습니다. 이후 북한 주민들은 현금을 집에 보관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2009년 11월 30일, 북한은 다시 한번 화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이미 '고난의 행군' 이후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북한은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교환하도록 했으며, 이는 2002년 경제 개혁 조치 이후 심각해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암거래 시장을 단속하려는 의도로 보였습니다. 가장 큰 목적은 장마당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교환 한도를 세대당 10만 원으로 제한하고, 나머지 금액은 국가에 기부하거나 은행에 예치해야 한다는 불합리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주민들의 돈을 몰수하는 조치였고, 배급이 끊긴 상황에서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필수적이던 장마당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 사회는 큰 충격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돈을 훼손하거나 자살하는 행위가 처벌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에는 돈과 함께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떠다니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화폐 개혁 이후 쌀값은 초인플레이션으로 300배 이상 급등했고, 주민들은 더 이상 북한 화폐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장마당을 통제하려던 계획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장마당이 더 활성화되었습니다. 주민들은 달러, 위안, 엔화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반발도 거세졌습니다. 주민들의 저항은 전례 없이 강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북한 보안원을 사살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김일성의 초상화를 땔감으로 사용하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이 혼란은 김정은 후계 체제의 공식화 시기와 겹쳐, 일부 전문가들은 2009년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화폐 개혁으로 인한 내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발생했다고 추측합니다. 그 이후 주민들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장마당과 달러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북한 사회는 자본주의적 성향을 띠기 시작하며, '돈주'라 불리는 부유층이 등장했습니다. 빈부격차는 커졌고, 깡패나 조폭 같은 세력들이 장마당에서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외화벌이를 하던 사람들도 수수료를 내고 북한 돈으로 보상을 받는 방식이 무의미해지자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결국, 2009년의 화폐 개혁은 북한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켰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를 북한 정권의 위기가 심화된 이유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화폐개혁의 대안
우리나라는 1962년의 화폐 개혁 실패 이후, 우리나라 역대 정부들은 화폐 개혁을 시도하려다 결국 여론의 반발과 경기 악화의 두려움으로 포기했습니다. 당시 화폐 개혁은 국민들의 돈을 감시하고 검열하려는 목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정부가 돈을 뺏으려는 것 아니냐'는 공포가 커졌습니다. 화폐 개혁은 국민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추진되어야 하지만, 역사적으로 인도나 터키처럼 정치적 불안정과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각한 나라에서 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래서 화폐 개혁은 좋은 이미지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글로벌 투자자들 역시 한국의 화폐 개혁을 불안하게 볼 수 있습니다. 화폐 단위를 변경하면 전산 시스템과 국제 거래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복잡한 과정을 겪기보다는 환율을 안정시키고 경제를 키우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결국, 화폐 단위를 조정할 필요는 없으며, 환율이 낮아 보이는 것은 기분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 경제를 성장시키고 외환 보유고를 늘리며 물가를 안정시킨다면 자연스럽게 환율도 개선될 것입니다.